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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HQ

[오이카게] 위로



오이카와 토오루는 결코 겸손한 놈이 못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파악이 재빨랐고, 영악하기도 하다. 주제 파악도 잘해서 가끔씩 땅을 파고 들어가는 일도 잦았지만 문제는 없었다. 그를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었고, 그에게 쏟아지는 기대를 지탱해주는 팀메이트들이 있었다. 오이카와를 믿고 따르는 후배들도, 무한정의 신뢰를 보내는....


빌어먹을 토비오까지. 아득하게 차오르는 증오가 이를 아득 갉아먹었다. 트라우마 따위는 이미 옛날에 극복했고, 재능으로는 뒤질지 몰라도 세터로서의 실력으로는 지지않는다 자부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에게 곤란한 것은 온갖 공세를 펼쳐오는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중학교 시절, 1년도 제대로 함께하지 못했던 주제에 오이카와를 졸졸 따라다녔다. 천재에다가 2년 후배인 녀석이 그를 본보기로 삼았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끔찍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결코 나무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오이카와를 열렬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차마 존경 따위로 표현될 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시때때로 몰려오는 그것은 일종의 애정이었다. 어떻게 포장 할 수도 없이 사랑으로 뒤범벅된, 그런 것.


카타르시스가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결코 카게야마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이를 통해 미약하게 남아있던 천재에 대한 부러움을 멀끔하게 씻어내릴 수 있었다.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그는 대충 그런 존재였다.


어쩌면 그 날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른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전국 진출 기회였던 봄대회를 싸그리 날렸다. 모욕적인 표현이지만 사실이다. 그는 이제 학창시절에 전국에 진출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더이상 쏟아지는 기대에 휘청거릴 수도 없었으며, 무한정의 신뢰는....


빌어먹을,


토비오.


이를 아득 갈았다. 카게야마에게 진 것이 아니라 카라스노에게 진 것이다. 그 사실은 오이카와의 뇌리에 콱 박혀서 사라지지 않았지만, 조금은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아무리 성숙한들 사람은 본능이라는게 있고, 오이카와 역시 사람이었다.


억누르고 제압하던 것들이, 한방에, 빵!


우웩.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그는 카게야마를 찾아나섰다. 경기가 끝난 직후의, 호승심 가득한 시선이 아니다. 차마 동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질척한 그 눈이 필요했다. ...마침내야.


"안녕, 토비오."
"오이카와 선배."


약간의 신경전이 오갔으나, 그는 가볍게 말했다. "우리, 사귈까?" 아마 반 쯤은 정신이 나갔었는지도 모른다. 이와이즈미에게 한방 맞는다거나, 하다못해 카게야마가 무슨 소리냐고 빽 고함이라도 쳤다면 정신이 돌아왔을테다.


하지만 거기에 이와이즈미는 없었고, 카게야마는 큰 소리 대신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장 후회했다. 카게야마는 딴에 연인이랍시고 애정을 표현했지만, 오이카와에게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되려 안좋은 쪽으로라면 모를까. 한순간의 치기어린 짓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으나... 방도가 없었다. 이미 그들은 사귀는 사이였고, 주변에 알리지 않는다고 한들 오이카와가 먼저 교제를 제의한 건 사실이다. 아무리 카게야마를 싫어한다고 한들 다짜고짜 찰 수는 없었다. 그가 차릴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오이카와는 이따금 그를 만났다. 스포츠 전형으로 이미 대학이 확정된 그에게 수험 공부는 남의 일이었다. 물론 기본 머리가 괜찮은 만큼 공부한다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만족했다. 카게야마와의 관계도 딱히 진전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들끓던 증오심 비스무리한 것은 가라앉았다.


그리고 차츰 무관심해졌다. 부정적인 마음마저 없는 그때는 단순히 후배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쑥맥인 카게야마는 어떤 스킨쉽도, 다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한눈을 팔았다. 바람이랄 것도 없었다. 카게야마를 연인으로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매모호한 관계를 끝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귀여운 여자아이와 사랑을 속삭였고, 카게야마는 그걸 봤다. 심지어 오이카와가 그녀와 입 맞출 때였다. 그 광경에서 마주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 당황하기까지 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드디어 우리의 어정쩡한 관계가 끝이 나는구나!


....그리고 카게야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가 치고 싶다고 하면 아무도 없는 곳까지 안내할 의향마저 있었다. 그가 차릴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딱 그정도였다. 먼저 차지 않는 것. 어쩌면 그마저도 카게야마를 이용했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예의를 차린답시고 다른 여자와 바람피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관계는 지속됐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신경은 썼으나 배려는 하지 않았다.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카게야마와의 약속에서도 여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오면 멀뚱히 받았다. 자리를 피하려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고, 다 들릴 만큼만 소리를 죽여서 사랑을 속삭였다.


그렇게 멍청한 시간이 지나고 다음해가 돌아왔다. 다시 인터하이가 열렸고, 굳건하던 작년 3학년의 부재는 생각보다 큰 부분을 차지했다. 에이스 스파이커가 하나 줄었고, 리시브에 통달했던 주장이 아니다. 엔노시타는 정신적인 면에서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다이치에 비하면 반년정도 부족한 실력이었다. 결론은, 세이죠에 졌다는 뜻이다.


시합을 보러 갔던 오이카와는 한껏 들떴다. 비록 그는 없었지만, 세이죠는 잘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었다. 아쉽지만 뿌듯한 감정을 품고 세이죠의 대기실에서, 작년의 3학년들과 일장연설을 뽐냈다.


함박미소를 띄고 돌아가는 길에 본 것이 괴짜콤비였다. 어지간히 분했는지 질질 짜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화는 뭉개져서 겨우 들리고 있었다.


"...년에는, 꼭..... 이길거야."
"당연, 하지. ...멍청아."
"같이, 코트에, 서서...."


울먹거리던 고개를 든 꼬맹이는 소리쳤다. "꼭 계속 배구할거야. 너하고!" 카게야마 역시 "당연하지, 멍청아! 리시브나 연습해!" 라며 면박을 줬다. 그 광경을 보며 오이카와는, '나한테 질질 짤 일은 없겠네.'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은, 정말로 연락이 없었다.


오이카와가 세이죠였다는 이유인지, 아니면 그가 세이죠라는 소속을 자랑스럽게 내보여서 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카게야마는 단 한차례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위로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시합에 대해서 묻는 것 까지도 으레 흐름을 끊어버리곤 했다.


그때였다면 되돌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여전했다. 그리고 둘의 관계 역시, 카게야마가 수험생이 되고 졸업해서 대학생이 될 때까지 그대로였다.


둘은 몸의 관계까지 맺었고, 횟수는 그냥저냥 유지해나갔다. 이제 슬슬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없으면 어색할 정도로 가까워졌으나 배려심―안좋은 차원에서의― 는 여전했고.... 카게야마도 여전했다.


"토비오, 일어났...."


―없네.


조금 냉정해졌다는 것을 뺀다면, 그와는 대부분이 익숙해졌다. 카게야마는 점차 배구에 대한 이야기도 일상에 대한 이야기도 줄여나가서, 지금에 와서는 기껏해야 스케쥴에 대해 말하는게 끝이다. 아니면 오이카와의 수다에 맞장구 쳐주거나, 섹스를 하거나.


그만둘 법한데도 여전히 관계를 이어나가는 카게야마나, 끝까지 본인이 안차고 바람만 주구장창 피는 오이카와. 둘은 멍청한 꼬라지 까지 똑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벌도 같이 받았는지 모른다....


그들의 기묘한 관계는 누구의 걱정도 사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것조차 모르니, 어쩔 수 없다. 다만 신기할 정도로 카게야마에 대한 오이카와의 경멸이 줄어들었다는 것 정도로 주변은 만족했다. 어쩌면 카게야마도.


둘의 관계는 지진부진했다.


그리고 대학생 종합 경기날, 카게야마는 드물게 상기된 얼굴로 경기에 나갔고, 패했다. 떨어진 강호였던 카라스노에서 1학년때 전국을 간 것은 희귀한 경험이 틀림없지만, 사실 운빨도 없잖아 있었다고 생각한다. ...딴에는.


어쨌든 그 날, 오이카와는 위로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해라' 기에는 그 애가 노력하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자만하지 말라는', 도 전혀 관계없는 단어고, '너는 이 오이카와씨가 인정한...'


쾅. 머리를 박았다. 이마가 발갛게 부어올랐을 테지만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거다. 연인으로서의 자각은 전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어쨌든 몸을 섞으면서 빌어난 일종의... 정. 혹은 후배를 아끼는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감정 말이다.


오이카와는 애가 닳도록 걱정의 말과 충고의 말을 되뇌이며 어떻게든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작정했지만, 결국 한마디도 떠올리지 못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카게야마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도.


다음 날, 카게야마가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멀쩡하고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오이카와는 슬쩍 배알이 꼴렸다. "토비오, 어제 어디서 잤어?" 당황스런 기색없이 그는 대답했다. "히나타네 집에서 잤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같이 시합에 나갔는데 져서요."


그리고 오이카와는 갑갑증을 느꼈다. 왜인지는 전혀 몰랐으나 이내 짐작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 쌓였는지도 몰랐던, 앞으로도 몰라야했던 감정이다. 그러니까, 신뢰말이다. 그들이 타인의 탈을 쓴 연인관계라고 해도 몇 년을 함께 했다. 그런 그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당연히.


2016.11.26 백업
http://stara-hq.postype.com/post/294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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